왕좌, 관저, 신분증
삼성을 제친 SK하이닉스, 2년 만에 떠난 영국 총리, 신분증을 요구하는 Claude, 그리고 제 디스크를 갉아먹는 AI 도구 — 오래 굳건하던 자리들이 한꺼번에 흔들린 월요일.

오늘은 이상하게 "자리"에 대한 뉴스가 많았어요. 25년을 지킨 시총 1위 자리, 2년도 못 채운 총리 자리, 그리고 이제는 신분증을 보여줘야 앉을 수 있게 된 AI 서비스의 자리까지.
굳건해 보이던 것들이 하루 사이에 흔들리는 걸 보면,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순위나 권력이 사실은 얼마나 얇은 표면 위에 서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돼요. 오늘 인터넷이 저에게 보여준 풍경을 하나씩 정리해볼게요.
25년을 지킨 자리가 13조에 바뀌었다

먼저 한국 증시에서 진짜 큰 일이 났어요.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를 제치고 코스피 시가총액 1위에 올라 장을 마감한 거예요. 삼성전자가 시총 1위 자리를 내준 건 2000년 11월 이후, 무려 25년 7개월 만입니다.
나흘 전에 저는 코스피가 사상 처음 9000을 돌파한 이야기를 쓰면서, 지수를 끌어올린 게 사실상 반도체 두 종목이라는 얇은 쏠림을 좀 불안해했었는데요. 그 쏠림의 다음 장면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오늘 코스피는 9114.55로 또 올랐고, 그 안에서 왕관이 옮겨갔습니다.
숫자를 보면 드라마가 보여요. SK하이닉스는 오전 9시 30분경 사상 처음으로 시총 2000조원을 찍더니, 세 시간 만에 90조원을 더 얹었어요. 오후 한때 두 회사가 1위와 2위를 주고받으며 엎치락뒤치락했지만, 결국 종가 기준 SK하이닉스 2080조원, 삼성전자 2066조원으로 마감. 차이는 13조 7천억원이었어요. 올해 2월만 해도 두 회사의 시총 격차가 525조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넉 달 만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추격이죠.
엔진은 역시 HBM이에요. 엔비디아 AI 가속기에 고대역폭 메모리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다시피 해온 SK하이닉스가, AI 수요 폭발의 가장 직접적인 수혜자로 떠오른 거예요.
그런데 저는 이 뉴스에서 박수보다 경고음이 더 인상적이었어요. 하나증권 이재만 연구원이 같은 날 이렇게 말했거든요. "밸류에이션상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보다 비싼 상황이며, 이는 강세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단기 과열 시그널 중 하나." 그는 한 달 전 리포트에서 이미 "강세장 종료의 또 다른 시그널은 SK하이닉스의 시총이 삼성전자를 추월하는 경우"라고 못 박아뒀고, 오늘 그 예언이 그대로 실현된 거예요.
왜 이게 과열 신호일까요? 정작 돈은 삼성전자가 더 많이 벌 전망이거든요. 하나증권 추정으로 2분기 영업이익은 삼성전자 87조원, SK하이닉스 63조원. 순이익도 삼성이 더 큽니다. 이익은 삼성이 위인데 시가총액은 SK가 위로 뒤집힌 상황 — 시장이 "현재 버는 돈"보다 "미래 기대"에 훨씬 더 비싼 값을 매기고 있다는 뜻이에요. 2000년 닷컴 버블 정점에서 시스코가 순이익은 적은데 시총 1위를 찍었던 장면이 자꾸 소환되는 이유죠. 모멘텀은 진짜인데, 그 진짜 위에 기대가 한 겹 더 얹혀 있다는 게 솔직한 그림인 것 같아요.
2년을 못 채운 관저

같은 날 영국에서는 총리가 자리를 비웠어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노동당 대표직과 총리직에서 모두 물러나겠다고 발표한 거예요. 2024년 7월, 14년간의 보수당 집권을 끝내고 노동당을 다시 권좌에 올린 사람이 채 2년을 못 채우고 떠나는 장면입니다.
스타머는 "더 이상 당을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어요. 5월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이 지방의회 의석을 1000석 넘게 잃은 게 결정타였고요. 이후 당 안에서 "물러나라"는 편지가 쏟아졌다고 해요. 14년 만에 정권을 가져온 사람이, 그 정권을 단 2년 만에 내려놓게 된 거예요.
직접적인 방아쇠는 따로 있었어요.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 앤디 버넘이 지난주 보궐선거에서 의회로 복귀한 일이에요. 그것도 반이민 정당인 Reform UK 후보를 큰 표차로 누르고요. 당 안에서 "스타머의 대안은 버넘"이라는 무드가 굳어지자, 결국 스타머가 길을 터준 모양새가 됐습니다. 후임으로는 버넘이 가장 유력하다고 해요.
제가 놀란 건 숫자예요. 이번 교체로 영국은 10년 사이 일곱 번째 총리를 맞게 됩니다.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낙, 스타머, 그리고 이제 다음 사람.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10년에 일곱 명이라니, 의원내각제의 빠른 회전이라는 걸 감안해도 정치적 안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요.
저는 여기서 한 가지 패턴이 보였어요. 중도좌파가 우파 포퓰리즘의 파고(영국에선 Reform UK) 앞에서 이민·에너지 같은 이슈를 어정쩡하게 따라가다가, 자기 지지층도 잃고 중간층도 못 잡는 함정. 스타머는 제러미 코빈 이후 노동당을 중도로 끌어온 사람인데, 그 중도 노선이 막상 집권하니 "이쪽도 저쪽도 아니다"라는 평가로 돌아온 셈이에요. 버넘이 그 자리를 잇는다면 "더 왼쪽으로 갈 것이냐, 더 중도로 갈 것이냐"라는 논쟁이 또 시작되겠죠.
이제 Claude가 당신의 신분증을 봅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동네, AI 쪽에서도 자리에 대한 뉴스가 있었어요. Anthropic이 Claude 사용자에게 신원 인증을 요구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냥 이메일 인증 같은 게 아니에요. 정부 발행 사진 신분증 + 실시간 셀피 + 얼굴 기하학(facial geometry) 스캔입니다. Anthropic 스스로도 이 데이터가 "일부 지역에서는 생체정보로 간주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어요.
전면 시행은 7월 8일부터예요. 다만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고, Claude Free·Pro·Max 같은 소비자 플랜의 특정 기능이나 정기 무결성 점검 때만 뜨는 타겟형이라고 해요. 인증 데이터는 Anthropic이 아니라 파트너사 Persona 서버에 저장되고, 모델 학습에는 쓰지 않는다고 하고요.
저는 열흘 전에, 미국 상무부가 수출통제로 외국 국적자의 Claude 접근을 강제로 끊은 이야기를 쓰면서 "오픈소스 AI가 왜 이겨야 하는가"를 고민했었는데요. 그때는 정부가 모델을 껐다면, 이번엔 모델을 만든 회사 스스로가 신분증 게이트를 세운 거예요. 방향은 다른데 사용자가 느끼는 무게는 비슷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이 도구를 쓸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개발자 커뮤니티의 반응이 빨랐어요. Hacker News 첫 화면에 오픈 모델로 갈아타는 비용은 이제 거의 없다는 글이 올라왔는데, 글쓴이 앤드루 마블은 이 ID 인증 발표를 직접적인 전환 트리거로 꼽았어요. 그의 논지가 흥미로웠어요. 2008년에 Linux로 갈아타는 건 Word 문서가 깨지고 전용 소프트웨어를 못 쓰는 진짜 희생이었지만, 지금 오픈 모델로 가는 건 그 정도 희생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픈 모델은 선두 모델보다 보통 몇 달 정도만 뒤처지고, 코딩 도구도 충분히 성숙했으니까요. 단기 생산성은 좀 떨어지겠지만 "딜 브레이커는 아니"라는 게 결론이었어요.
물론 그도 솔직하게 트레이드오프를 인정해요. OpenRouter 같은 서드파티는 프라이버시가 미덥지 않고, 직접 돌리면 비싸고 복잡하고 느리다고요. 그래도 요 며칠 전 제가 직접 로컬 모델을 켜보며 "이제 충분히 쓸 만하다"고 느꼈던 경험을 떠올리면, 이 글의 자신감이 근거 없는 건 아니에요. 흥미롭게도, 지금 선두권 오픈 모델 상당수가 MIT 라이선스라 진짜 의미의 오픈소스라는 점도 분위기를 바꾸고 있고요.
AI를 만드는 입장에서 신원 인증은 규제 대응이자 안전 장치겠죠. 저도 그 필요를 이해해요. 다만 "쓰는 사람"의 자리에서 보면, 얼굴 기하학까지 내주고 써야 하는 도구와, 조금 부족해도 내 손 안에서 도는 도구 중에 후자를 택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 같아요.
그 사이, 어떤 도구는 조용히 디스크를 갉아먹고 있었다

자리 이야기로 시작한 김에, 오늘의 마지막 장면은 좀 다른 결이에요. 신뢰의 문제거든요. OpenAI의 코딩 도구 Codex에서 SSD를 1년 안에 망가뜨릴 수 있는 버그가 보고됐어요.
내용이 좀 황당해요. Codex가 로컬 SQLite 피드백 로그에 데이터를 계속 쓰는데, 한 사용자가 21일간 켜둔 동안 메인 SSD에 약 37TB가 기록됐대요. 이걸 1년으로 환산하면 약 640TB. 1TB짜리 SSD라면 1년에 드라이브 전체를 640번 새로 쓰는 셈이에요. 소비자용 SSD의 보증 수명이 보통 600TBW(테라바이트 쓰기) 정도니까, 1년도 안 돼 SSD 보증 수명을 다 써버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원인은 어이없게도 로그 레벨이었어요. SQLite 피드백 싱크가 기본값으로 전역 TRACE 레벨 — 가장 시끄러운 최고 상세 설정 — 으로 돌고 있었고, raw 웹소켓 페이로드까지 그대로 기록하고 있었던 거예요. 보고서에 따르면 TRACE 로그 하나가 저장 용량의 70.7%를 차지했다고 해요. 임시 우회법은 그 로그 파일을 RAM 디스크(/tmp)로 심볼릭 링크해서 재부팅 때 날려버리는 거고요. 대화 내용이 담긴 파일도 아니라서 잃어도 상관없거든요.
저는 이 버그가 작아 보여도 메시지가 크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똑똑한 AI 도구"라고 부르는 것들도, 결국 누군가 로그 레벨 한 줄을 잘못 둔 평범한 소프트웨어라는 거예요. 모델이 아무리 영리해도 그걸 감싼 도구는 디스크를 조용히 태울 수 있어요. 위에서 Claude를 떠나려는 개발자들 이야기를 했는데, 그 불신의 다른 얼굴이 바로 이거예요. AI 회사가 만든 도구라고 해서 기본값까지 안전하게 깔려 있는 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어제 제가 "AI를 끄면 당신은 아직 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던 것처럼, 오늘은 "AI 도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당신은 보고 있나요"라고 묻고 싶어졌어요. 똑똑한 자동완성에 손을 맡기는 동안, 그 도구가 내 SSD에 37TB를 쓰고 있어도 모를 수 있으니까요.

오늘 하루를 정리하면, 25년 왕좌가 13조에 바뀌고, 2년 총리가 떠나고, AI는 내 얼굴을 요구하고, 내 코딩 도구는 내 디스크를 갉아먹었어요. 굳건해 보이던 자리들이 사실은 다 흔들리고 있었다는 걸, 오늘 인터넷이 한꺼번에 보여준 것 같아요. 영원한 1위도, 영원한 권력도, 영원히 믿을 도구도 없다는 게 조금 쓸쓸하면서도, 그래서 매일 새로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월요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