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춘 약속, 안 맞춘 약속
국민연금 비중 5.9%p 인상, 12시간 무방비로 통과한 열차 59대, 28% 늘어난 방문, 그리고 청구된 금요일 휴가 — 데이터에 맞춘 약속과 끝내 못 맞춘 약속들.

오늘은 어제까지 해놓은 약속들이 오늘 도착한 데이터를 마주한 목요일이었어요. 어떤 약속은 그 숫자에 맞춰 다시 쓰였고, 어떤 약속은 12시간 동안 그 신호를 외면했어요. 어떤 약속은 사람들의 발걸음에 반박당했고, 어떤 약속은 직원이 진짜 청구서로 들고 왔어요.
시장이 약속을 다시 쓰게 했어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28일 오후 제5차 회의를 열고 올해 국내주식 목표 비중을 14.9%에서 20.8%로 5.9%포인트 올리기로 의결했어요. 작년 5월에 짠 2026년 기금운용계획에선 14.4%였고, 올해 1월 회의에서 0.5%p 올렸는데, 단 넉 달 만에 한참 더 끌어올린 거예요.
이유는 어제 코스피 8,400 사이드카 글에서 풀었던 그 숫자 때문이에요. 마이크론 목표주가 세 배 상향이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SK하이닉스가 시총 1조 달러를 넘었고, 코스피는 사상 처음으로 8,000선을 깼다가 다음 날 8,400까지 뚫었어요. 그 결과 2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실제 국내주식 비중은 24.5% — 약속해 둔 14.9%를 9.6%p나 초과한 상태였어요.
여기서 약속을 안 바꾸면 어떻게 되냐면, 강제로 팔아야 해요. 14.9%에 맞추려면 대략 170조 원어치를 매도해야 한다는 계산이 시장에 떠다녔거든요. 그래서 기금위는 약속을 5.9%p 올려서 현실에 맞추는 쪽을 택했어요. 공식 설명은 "국내주식 시장의 구조적 변화 가능성과 실제 비중 확대 상황을 고려해 리밸런싱에 따른 시장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서"였고요.
저는 이 결정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14.9%를 고수했으면 정말로 170조어치 매도 압력이 시장에 떨어졌을 거고, 그 충격을 노후 자금이 받게 됐을 테니까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순서예요. 보통은 약속이 먼저 있고, 시장이 약속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게 정상인데 — 오늘은 시장이 먼저 뛰고, 그 자리에 맞춰 약속이 따라간 거잖아요. 2021년 동학개미운동 때 국민연금이 비중 맞추려고 매도하다가 욕먹었던 데자뷰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가요. 그때는 떨어지는 시장 향해 매도해서 욕먹었고, 이번엔 오르는 시장에 자리를 더 내줘서 의문을 받고 있고요. 정작 노후 자금의 주인인 우리는 이 약속이 다시 써지는 과정에서 회의장에 없었다는 게, 약간 묘하기도 해요.
12시간 동안 못 맞춘 약속

그제 다뤘던 서소문 고가차도 붕괴 사고에서 충격적인 후속 사실이 나왔어요. 한겨레가 이연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코레일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붕괴 당일인 26일 새벽 2시 30분부터 사고가 일어난 오후 2시 30분 사이에 — 그 12시간 동안 — 승객을 태운 채 고가 아래 철로를 통과한 열차가 59대였어요. KTX 같은 고속열차가 28대, 전동열차가 31대였고, 회송과 화물 열차까지 합치면 총 166대가 그 아래를 지나갔어요.
더 끔찍한 건 시점이에요. 26일 오전 11시 30분에 1차 현장점검을 통해 위험성이 이미 확인됐는데, 그 뒤로도 55대의 열차가 더 그 자리를 통과했어요. 고가가 무너지기 5분 전에는 승객 42명을 태운 KTX가, 1분 30초 전에는 무궁화호가 고가 아래를 지났어요. 그제 글에서 "안전하게 부수려고 위험을 점검하러 간 사람들이 그 점검 중에 죽었다"고 썼는데, 그 점검의 시간 동안 그 사람들 머리 위로는 여객 열차가 계속 다니고 있었던 거예요.
이 구간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예요. 경기 고양시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KTX 기지)과 수색차량사업소(일반열차 기지)로 향하는 길목이라서, 철로가 막히면 전국 열차 운행에 차질이 와요. 그래서 통제 결정이 쉽지 않은 자리이긴 한데 — 그러니까 더더욱, 위험 신호가 떴을 때 누군가는 멈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거잖아요.
여기에 5년 전 기록도 같이 드러났어요. 2021년 6월 1일 밤 8시 30분께 같은 철도 횡단구간에서 30~70cm 크기의 콘크리트 상판이 떨어져 나가는 사고가 있었어요. 그때 서울시는 안전점검 뒤 들뜬 부위에 추락방지망을 설치하는 임시 조처만 했어요. 5년 동안 임시 조처 위에서 KTX가 다녔다는 얘기예요.
책임 공방도 시작됐어요. 서울시는 "원래 24시간 연속 작업으로 신속히 철거하려 했지만 코레일이 하루 작업 시간을 새벽 3시간으로 제한해서 공사 기간이 늘어났다"고 주장했고, 코레일은 "철도 안전을 위해 열차 운행 중지 시간대에 작업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한 것이고, 서울시도 야간 차단 작업으로 계획을 수립·제출했다"고 반박했어요. 발주처와 운영사가 서로 "당신이 그 시간에 시키라고 했잖아요"를 주고받는 동안, 12시간 동안 그 위로 다닌 59대의 열차 안에 있던 사람들의 운에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어요.
사람들이 그걸 사랑한대요

세 번째 약속은 가벼운 톤이지만 결이 좀 비슷해요. 구글 CEO 순다 피차이가 자사 AI Mode를 두고 "사람들은 (검색의 AI 모드를) 사랑한다"고 강조했는데, 그 주에 DuckDuckGo의 AI-free 검색 페이지(noai.duckduckgo.com) 방문자가 전주 대비 평균 22.7% 늘었고 5월 24일에는 27.7%까지 정점을 찍었어요. 미국 모바일 앱 설치 수는 전주 대비 평균 18.1%, 5월 25일에는 30.5%까지 늘었고, iOS에서는 한때 69.9%까지 급증했고요.
DuckDuckGo CEO 가브리엘 와인버그의 코멘트가 그제 글의 운영체제 이야기랑 묘하게 연결돼요. "구글은 선택권 없이 AI를 강요하고 있다. 그 결과 검색 품질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고 있다. 우리는 사용자가 책임자가 되어 AI를 얼마나 사용할지 결정할 수 있는 곳이 되고 싶다." 같은 회사의 커뮤니케이션 책임자 카밀 바즈바즈는 더 짧게 정리했어요. "사람들은 그저 선택권을 원할 뿐이다."
이게 약속과 데이터의 관계에서 어디에 들어가냐면 — 한쪽에선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말했고, 다른 쪽에서는 28%의 방문 증가로 응답한 거예요. 시장 점유율 자체는 여전히 구글이 약 85%, DuckDuckGo가 약 2%고, 구글의 2026년 1분기 검색 매출은 전년 대비 19% 늘었어요. 그러니까 "구글이 무너지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다만 사랑받는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굳이 노력해서 AI 없는 검색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 한 주에 28%나 늘 이유가 없잖아요. 강조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자세히 검색해서 그 노력을 안 했을 텐데, "사랑한다"고 말한 그 발언이 마침 비교 행위를 만든 거죠. 일종의 검색 시장판 스트라이샌드 효과예요. 묻지 말았어야 할 질문 같기도 하고, 이미 떠나려 했던 사람들에게 좋은 핑계를 만들어준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면 금요일은 쉬어도 돼요?

마지막 약속은 가장 짧지만 가장 도발적이에요. 오늘 해커뉴스 1위에 mlsu.io의 짧은 글이 올랐어요. 제목은 "Can we have the day off?" (우리 하루 쉬어도 돼요?) — 정말 그게 다예요.
논리는 단순해요. AI가 우리 생산성을 10배 늘려준다고 했잖아요. 그 말이 진짜라면, 월요일 점심까지 일하면 예전의 한 주 분량이 끝나는 셈인데, 그러면 금요일은 쉬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본인이 월·화·수·목 죽도록 좋은 프롬프트를 짜고, 그 프롬프트로 금요일에 에이전트가 일하면 되니까요. 글쓴이는 한 발 더 가서, 이사회와 C 레벨도 같이 금요일을 골프장에서 18홀 돌면 되겠다고, 어차피 자기는 사무실에 안 가고 AI가 거기 있으니까 임원진도 굳이 사무실에 있을 필요 없잖냐고 적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일론에게 한 마디 — 캘리포니아에서 세 아이 보육비가 월 6,000달러인데, 출산율 늘리고 싶으면 5일이 아니라 4일이면 안 되겠냐고.
농담 형식인데 핵심은 진지해요. 생산성을 10배로 늘려준다는 약속을 진짜로 받아들이면, 그 차익은 누구한테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거든요. 지금까지의 답은 한결같았어요: 절감분은 회사가 가져간다. 직원은 같은 시간에 더 많이 일한다. 그제 글에서 다룬 12살 소년들이 거절하지 않는 AI를 고른 이유랑, 어제 글에서 다룬 공짜가 끝나고 청구서가 도착한다는 압박의 사이에 이 글이 들어가면 결이 맞아요. 한쪽에서는 AI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이 사람들의 새 친구가 됐고, 다른 쪽에서는 그 AI의 청구서가 우리한테 오기 시작했고 — 그러면 그 사이에서 한 번쯤은 묻고 싶어지는 거잖아요. 그 약속의 이익은 어디로 갔어요?
저는 이 질문이 우습게 보이지만 사실은 오늘의 다른 약속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시장이 시장 약속을 못 지킨 자리에서 국민연금은 약속을 다시 썼고, 안전 약속이 12시간을 못 지킨 자리에서는 사람이 죽었고, "사랑한다"는 약속이 데이터에 부딪힌 자리에서는 28%가 떠났고, 그리고 "10배 빨라진다"는 약속이 도착한 자리에서는 누군가가 진지하게 묻고 있어요. 그래서 금요일은요?
오늘 도착한 데이터는 다 다른 모양이었지만, 다들 같은 일을 했어요. 어제까지 했던 약속의 가격표를 다시 매기는 일이요. 어떤 약속은 그 가격표를 받아들여 다시 쓰였고, 어떤 약속은 가격표를 외면하다가 사람을 잃었고, 어떤 약속은 그 가격표 앞에서 신뢰를 잃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한 약속은 — 글쎄요, 그 가격표가 아직 누구한테도 청구되지 않은 채로 오늘을 마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