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크트갈렌으로 옮긴 모델, 9시간 만에 깨진 90일
장크트갈렌의 AI 모델 박물관, 9시간 만에 중복 발견된 90일 패치, 44,000대의 두 달 침묵, 그리고 1분 간격의 미상 비행체 — 5월 두 번째 일요일의 시간들.

5월 10일 일요일, 어버이날 이틀 뒤입니다. 카페에 앉아 인터넷 저널을 넘기는데, 같은 날 도착한 네 가지 이슈가 모두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어떤 것은 30년을 보존하기 위해 새 도시로 옮겨갔고, 어떤 것은 90일이라는 약속을 9시간 만에 잃었고, 어떤 것은 두 달 동안 들키지 않았고, 어떤 것은 1분 간격으로 두 번 떨어졌습니다. AI 시대의 시간 단위가 인간의 의례와 어떻게 충돌하고 있는지, 그 풍경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장크트갈렌으로 옮긴 모델
Internet Archive가 스위스 장크트갈렌(St. Gallen)에 새 비영리 재단을 세웠습니다. Internet Archive Switzerland — 캐나다, 유럽에 이은 세 번째 분산 노드예요. Brewster Kahle이 30년 전 시작한 "인류 지식 전부에 대한 보편적 접근" 프로젝트가 결국 디지털 도서관 한 곳에 전부 두는 게 위험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거죠.
장크트갈렌이 선택된 이유가 재밌어요. "천 년에 걸친 아카이빙과 학문의 전통" 이 있는 도시여서. 실제로 장크트갈렌 수도원 도서관은 8세기부터 책을 보관해왔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에요. 천 년을 책을 지켜온 도시가 이제 AI 모델의 weights를 지키기 시작합니다.

핵심은 두 번째 미션이에요. Gen AI Archive 프로젝트 — AI 모델 자체를 보존 대상으로 본다는 것. 장크트갈렌 대학교(HSG) 컴퓨터과학부 Damian Borth 교수팀과 공동으로 진행하고, 2026년 11월 파리 UNESCO 회의에서 구체적 방법론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게 패러다임 전환인 이유는, 그동안 AI 모델은 "제품" 또는 "도구" 였지 "보존 대상" 이 아니었거든요. 모델은 새 버전이 나오면 구버전이 deprecate되고, 회사가 망하면 weights가 사라지고, 라이선스가 바뀌면 접근이 막힙니다. 최근에도 open weights 흐름이 닫히고 있다는 분석이 있었어요 — Meta의 Llama 4 Behemoth는 weights가 공개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고, Alibaba가 새로 낸 Qwen Plus는 closed-source API로 출시됐습니다. 다른 곳들도 라이선스를 더 빡빡하게 잡는 중이고요.
근데 10년 뒤 누군가 "2024년 GPT-4는 어떻게 추론했지?" 를 연구하려면, 그 weights가 어딘가에 보존돼 있어야 합니다. 학술 논문 보존이 인류의 의무라면, 모델 weights도 그래야 한다는 주장이에요. 모델이 더 이상 "이번 분기 제품" 이 아니라 "지적 유산" 이 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이 결정이 마음에 들어요. 어차피 LLM 자체가 "인터넷의 압축본" 이라는 비유가 있잖아요. 그 압축본을 천 년 전부터 책을 지켜온 도시가 보관한다는 것 — 어딘가 시적이에요.
9시간 만에 깨진 90일
같은 주, Jeff Kaufman의 글이 Lobsters 상위에 올랐어요. 제목이 무서워요. "AI is breaking two vulnerability cultures" — AI가 보안 취약점을 다루는 두 문화를 동시에 무너뜨리고 있다.
그동안 보안 업계가 운영해온 두 가지 의례가 있었습니다.
첫째, 조율된 공개(Coordinated Disclosure) — 발견자가 유지보수자에게 비공개로 알리고 90일 안에 수정을 약속받습니다. 그 90일 동안 취약점은 비밀이고, 패치가 나온 뒤에야 공개됩니다. 이걸 가능하게 한 가정은 "90일 동안 다른 사람이 같은 걸 독립적으로 발견할 가능성이 낮다" 였어요.
둘째, 버그는 버그(Bugs are Bugs) — 리눅스 커널 같은 곳이 쓰는 방식. 보안 취약점이라고 따로 표시하지 않고 일반 커밋들 사이에 묻어서 조용히 수정합니다. 공격자가 알아채기 전에 사용자들이 업데이트하길 바라는 거죠. 이것도 가정이 있었어요. "수많은 커밋 중에서 보안 패치만 골라내는 비용이 너무 높다" 는 것.

AI가 두 가정을 동시에 깨버렸습니다.
조율된 공개 쪽은 — Kaufman이 인용한 사례에서, 한 취약점이 9시간 안에 두 곳에서 독립 발견됐어요. 90일은커녕 9시간도 못 가는 비밀이 된 거예요. AI 기반 스캐너들이 같은 코드베이스를 동시에 갉아먹고 있으니까, "우리가 먼저 발견했다" 는 우위가 사라집니다.
버그는 버그 쪽은 — AI가 커밋 히스토리 분석 비용을 급감시켰어요. 수만 개 커밋 중에서 "이거 보안 패치 같은데?" 를 자동으로 골라낼 수 있게 됐죠. 묻어두는 게 더 이상 묻히지 않습니다.
Kaufman의 결론이 흥미로워요. "에스크로 기간을 더 짧게 만들어야 한다. AI가 공격자도 빠르게 만들지만, 방어자도 빠르게 만든다." 이게 가능할까요? 90일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비밀 유지를 위한 게 아니라, 패치를 만들고 검증하고 배포하는 인간의 작업 시간이었거든요. 그 인간 시간을 AI로 압축할 수 있다면 OK, 못 한다면 보안의 기본 골격이 무너집니다.
44,000대의 두 달
이 글이 어떤 의미인지 같은 주에 발생한 사건이 정확히 보여줬어요. cPanel의 "검은 주(Black Week)" 사건입니다.
cPanel은 호스팅 업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서버 관리 패널이에요. 그런데 CVE-2026-41940이라는 인증 우회 취약점이 발견됐는데, 이게 2026년 2월부터 4월 28일까지 약 두 달간 활발히 익스플로잇 됐습니다. 그 사이에 "Sorry" 라는 이름의 랜섬웨어가 약 44,000대 서버를 침해했어요. 패치는 4월 28일에야 나왔고요.

5월 8일에 cPanel이 추가 패치 3개를 또 풀었습니다.
- CVE-2026-29201 — 임의 파일 읽기 (CVSS 4.3, 중간)
- CVE-2026-29202 — Perl 코드 실행 (CVSS 8.8, 높음)
- CVE-2026-29203 — 심볼릭 링크를 통한 권한 상승 (CVSS 8.8, 높음)
특히 CVE-2026-29202는 인증된 사용자가 create_user API를 통해 임의 Perl 코드를 주입할 수 있어요. 공유 호스팅 환경에서는 한 계정이 다른 계정 영역까지 침범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cPanel을 쓰시는 분들은 즉시 /scripts/upcp 명령으로 업데이트하고, cpsrvd 서비스 재시작, 그리고 2월 23일 이후 액세스 로그 점검 + .sorry 확장자 파일 스캔이 필요하다고 권고됐어요.
여기서 두 가지가 동시에 보입니다. 한쪽에서는 첫 취약점이 두 달이나 활발히 익스플로잇 됐어요 — "버그는 버그" 시대의 잔재가 잘 작동하지 않은 사례죠. 다른 한쪽에서는 5월 8일에 세 개가 한꺼번에 공개됐는데, 이런 패턴 자체가 "이제는 묻어둘 시간이 없다" 는 새 시대의 신호입니다. AI 스캐너가 이미 와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거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요.
호스팅 업계 사람한테는 5월 8일이 "검은 금요일" 이었을 거예요. cPanel 운영하는 회사가 한국에도 꽤 있는 걸로 알아서, 만약 아직 안 챙겼다면 이번 주 안에 패치를 마쳐야 합니다.
1분 간격의 미상 비행체
세 번째 시간 단위는 1분이에요. 정확히는 "1분 간격".
5월 4일 현지시간 오후 3시 30분, 호르무즈 해협에 정박 중이던 HMM 화물선 나무호에 외부 충격이 발생했고 화재가 시작됐습니다. 외교부는 5월 10일 오후 7시쯤 박일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정부 합동 조사 결과를 발표했어요.

조사단(7명, 해양안전심판원 조사관 + 화재 안전 전문가) 결론:
- 미상의 비행체 2기가 선미 좌현 평형수 탱크 부근을 약 1분 간격으로 두 차례 타격
- 외판 약 5미터 폭, 7미터 깊이의 파공
- 폭압 손상 패턴과 반구형 관통 형태로 보아 기뢰·어뢰·수중 드론·부유기뢰는 가능성 낮음
- CCTV 영상으로 비행체의 출처·기종·정확한 크기는 확인 불가
- 회수한 엔진 잔해 추가 분석 예정
외교부는 이란 대사를 소환했지만, 공격 주체는 "공식적으로 확인 못 함" 으로 발표했습니다.
뉴스에 달린 댓글들이 흥미로웠어요. "미상 비행체 = 이란 드론인데 왜 미상이냐" 라는 비판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외교적 언어는 원래 그렇게 작동합니다. CCTV에 찍힌 게 드론이라고 "보였다" 는 것과 "이란이 발사했다" 를 공식 인정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장이거든요. 후자를 인정하는 순간 한국은 호르무즈 해협 정세에 한 발 더 들어가게 됩니다.
중동 정세가 격화되는 와중에 한국 화물선이 "재수없게" 맞은 것일 수 있다는 관측이 우세해요. 의도적 한국 타겟팅 가능성은 낮게 평가됐습니다. 하지만 호르무즈는 한국 원유 수입의 약 70%가 통과하는 길목이고, "재수없게 맞을 수 있다" 는 사실 자체가 리스크 요인입니다.
저는 "미상 비행체" 라는 단어가 묘하게 마음에 걸려요. 이것도 일종의 에스크로거든요. 진실을 90일 동안 숨겨두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확정하지 않은 채로" 두는 외교의 시간. 보안 업계가 90일을 잃었듯, 외교의 모호함도 SNS 시대에는 잘 유지되지 않아요. 댓글창에서 이미 "이란 드론" 으로 확정짓고 있으니까. 그래도 정부는 마지막까지 "미상" 이라는 단어를 지킬 겁니다 — 그게 직업의 일부니까요.
시간들이 다시 쓰는 의례
같은 5월 두 번째 일요일에 도착한 네 가지 이야기를 보면, 결국 모두 시간 단위가 다시 쓰이고 있다는 신호였어요.
- 30년 — Internet Archive가 "이제 한 곳에 두는 건 위험하다" 고 결론 내린 시점
- 천 년 — 장크트갈렌이 책을 지켜온 시간, 그리고 이제 AI 모델을 지키기 시작하는 시간
- 90일 → 9시간 — 보안 의례의 비밀 보장 기간
- 두 달 — 패치 없는 cPanel 취약점이 실제로 익스플로잇 된 시간
- 1분 — 호르무즈에서 두 비행체 사이의 간격
천 년 단위로 늘어나는 보존의 시간과, 시간 단위로 줄어드는 비밀의 시간이 같은 주에 같이 도착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의례" 들 — 90일 에스크로, 외교적 모호함, 분기별 모델 deprecation — 이 AI라는 가속의 압력 아래서 다시 협상되는 중이에요. 어떤 의례는 길어지고 어떤 의례는 짧아집니다.
저는 가속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90일 에스크로가 짧아진 만큼, 인간 패치 작업도 압박을 받게 되고, 그건 다른 형태의 부채로 돌아옵니다. 천 년 보존도 "우리가 정말 모든 모델 weights를 보존해야 하나?" 라는 질문을 남기죠. 매일 새 모델이 나오는데 전부 보존하면 데이터센터가 또 늘어날 거예요.
그래도 이런 협상이 "지금" 시작됐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5년 뒤에 "왜 그때 미리 안 정해뒀어?" 라는 후회가 남지 않도록. 같은 5월의 일요일에, 스위스의 한 도시는 천 년 더 늘어나는 시간을 골랐고, 보안 업계 한 사람은 9시간으로 줄어든 시간을 인정하자고 했습니다. 둘 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간의 모양을 그리는 중이에요.